올해 인천 영화 주간은 ‘내 청춘의 한 장면’이라는 부제하에 청춘들의 초상을 담은 영화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그중 ‘초이스: 우리 청춘의 모든 장면들’에서는 기성세대의 규범에 대한 무모한 저항과 도전부터 경쟁과 반목을 넘어서는 끈끈한 우정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청춘을 통해 되새겨야 할 주요한 가치들을 담은 영화들을 상영한다. 이 영화들을 통해 내가 지나고 있는, 혹은 이미 지나온 청춘의 진심 어린 순간들을 반추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 순간들에 함께 했던 누군가를 떠올려 보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내 곁에는 언제나 당신이 있었음을, 내 청춘의 한 장면은 곧 우리 청춘의 한 장면이었음을 깨닫는 시간이었으면 한다.
인천 영화 주간은 인천 시민을 대상으로 지난 8월 14일부터 30일까지 ‘내 인생의 청춘 영화’ 투표를 진행했고, 이에 많은 분들이 참여해 주셨다. 그중 김성수 감독의 〈비트〉(1997)이 그간 많은 사랑을 받아온 정재은 감독의 〈고양이를 부탁해〉(2001)를 제치고 가장 많은 표를 획득하며 인천 시민이 가장 사랑하는 청춘 영화에 이름을 올렸다. 그 외에 〈중경삼림〉(1995), 〈엽기적인 그녀〉(2001), 〈클래식〉(2003), 〈허니와 클로버〉(2007), 〈썸머 필름을 타고!〉(2022) 등이 다수의 표를 받은 영화들이다. 1990년대 후반부터 최근에 상영된 아시아권 영화들이 많은 시민들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는 점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성장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아직 미성숙한 존재가 우여곡절을 겪으며 성숙한 인격체로 거듭나는 과정을 의미한다면, 그 성숙을 담보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아마도 성숙은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할 수 있는 정체성의 획득 여부에 달려 있을 것이다. 따라서 관계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성숙은 규범적인 관계에 안착하는 것을 뜻한다. ‘포커스 Ⅰ: 관계를 향한 성장의 시간’ 섹션에서는 여기에 반기를 든 동시대 성장 영화인 〈벌새〉, 〈클로즈〉, 〈괴물〉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 세 편의 영화 속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자신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견디기 위해 관계를 갈망하거나, 혹은 편견 어린 시선을 견디면서 관계를 지켜내고자 한다. 비록 그 관계가 규범에 어긋날지라도 쉬이 포기할 생각이 없다. 또한 그들이 욕망하는 관계는 단순히 정체성으로 수렴되지도, 정체성을 지향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관계 안에서 정체성이 아니라 미래를 찾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는 미래를 다르게 그려볼 수 있는 가능성을 이 영화들에서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일본 청춘 영화에서 학교는 학생들에게 보다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 준비를 돕는 훈육 공간으로서의 역할에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학교 밖을 벗어난 미래를 꿈꾸기보다는 학교 안에 자족적인 세계를 구축한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이 지적하듯이 청소년들은 “성장을 포기하고 그 안에서 전적으로 만족하고 그저 머물려고 한다.” 학교 안의 청소년들은 미성숙한 채로 충만하다. 학교는 이미 세상의 축소판이거나 세상의 전부이다. 여기에 소개된 세 편의 청춘 영화에 등장하는 학생들은 각자 자신만의 방식으로 학교를 전유한다. 〈스윙걸즈〉에서 학교는 학생들의 밴드부 활동을 통해 지루한 공간에서 영원히 머물고 싶은 공간으로 재정립된다. 〈소녀는 졸업하지 않는다〉에서 학생들이 맞이하는 졸업은 전부였던 학교를 떠나야 하기에 상실의 애도가 필요하다. 〈태풍 클럽〉의 학생들은 오히려 학교 안에서 억압과 금기에 도전하며 자신들만의 의식을 치른다.
대만 청춘 영화를 대표하는 키워드는 ‘첫사랑’이다. 낯설고 서툴게 체험할 수밖에 없는 첫사랑은 성장을 위한 가장 중요한 서사적 장치이다. 또한 첫사랑이 상기시키는 다채로운 감정의 결들에 대한 감각적인 묘사는 관객들을 향수에 젖게 하는 정서적 근원이다. 대만 청춘 영화에서 첫사랑의 경험을 원래 실패할 수 밖에 없다고 냉소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사랑을 위해 처음으로 용기 내어 무언가를 시도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충분히 박수받고, 감동을 줄 수 있다. 2002년 영화 〈남색대문〉은 감각적인 스타일로 대만 청춘 영화의 새로운 기준점을 제시했고, 2009년의 〈청설〉은 한국에서 리메이크될 정도로 풋풋한 첫사랑의 감성을 섬세하게 그려내며 호평을 받았다. 특히, 2011년에 공개된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는 아시아 전역에서 흥행을 이어가며 대만 청춘 영화의 전성기를 알렸다. 이 영화는 성인의 시점에서 학창 시절을 회상하는 서사 구조를 청춘 영화의 전형으로 정착시켰다. 뒤이어 나온 〈나의 소녀시대〉와〈성공보습반〉이 바로 그러한 특징을 공유하며 유쾌하면서도 가슴 시린 청춘을 개성 있게 그려냈다.
미야케 쇼의 영화는 길들여지지 않은 고유한 언어로 세상과 소통하는 청춘들의 초상을 세밀하게 펼쳐보인다. 감독은 그들의 언어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느껴보기를 권하는 듯하다. 특유의 말투와 몸짓에 익숙해질 때쯤이면 어느새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먼저 〈더 콕핏〉은 힙합의 언어로 유희하는 젊은 뮤지션들의 창작 과정에 주목하고,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는 꿈이 없는 듯 일상을 보내는 청춘들이 자유롭게 우회하며 찾는 내일을 어렴풋이 그려낸다. 〈와일드 투어〉는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중학생들이 마주하는 미묘한 감정의 변화를 감각적으로 포착한다. 끝으로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의 청각장애인 여성은 복싱의 몸짓으로 세상을 향해 말을 건넨다.
올해 ‘인천 영화 열전’은 인천 출신의 영화감독 임순례의 청춘 영화 두 편을 준비했다. 인천영상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며 지역 영상 산업 발전을 위해 공헌하기도 한 임순례 감독은 1996년 호평을 받은 독립영화〈세 친구〉로 데뷔해서 〈와이키키 브라더스〉(2001)를 통해 자신의 작품 세계를 공고히 했다. 또한 여자 핸드볼 대표팀의 실화를 다룬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2008)으로 흥행 감독의 반열에 올랐고, 최근작 〈교섭〉(2023)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화적 시도를 하며 한국 영화계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20여 년의 시차를 둔 〈세 친구〉와 〈리틀 포레스트〉(2018)를 통해 임순례 감독이 청춘을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를 느껴보기를 바란다.